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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궁궐, 조선을 말하다

궁궐, 조선을 말하다
  • 저자조재모
  • 출판사아트북스
  • 출판년2013-05-03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2-30)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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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제도와 이념은 궁궐에 어떻게 구현되었나

    건축의 관점과 건축 바깥의 관점 궁궐을 읽다




    얼마 전 궁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종영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조한 허구의 서사와 볼거리가 풍부한 사극은 과거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며 화제를 일으키곤 한다. 이러한 사극 열풍 속에 궁궐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면서 궁궐 인문학 강좌나 창덕궁 후원 달빛 기행, 국립고궁박물관의 <조선왕실의 어보전> 등 궁궐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도 다양해졌다. 또한 엄격함과 위대함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 궁궐이 삶의 현장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치 투쟁의 공간으로서보다 개인들의 삶을 중심으로 궁궐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경향이다. 궁궐 관련 책들도 눈에 띄는데 답사를 돕는 개론서, 문양의 상징을 이야기한 대중적 교양서에서 궁궐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심을 둔 역사 전공자들의 인문서, 건물의 형태에 초점을 맞춘 건축 전공자들의 학술서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 가운데 출간된 『궁궐, 조선을 말하다』는 경북대 건축학부 조재모 교수가 ‘체제’의 관점에서 궁궐을 탐독한 책으로 궁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체제’란 건축 행위에 전제된 계획 같은 ‘건축적 요소’와 궁궐의 실제 운영 방식·역사적 변화 같은 ‘건축 외적인 요소’ 모두를 일컫는다. 지은이는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가’와 ‘실제로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이념이 궁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살핀다 .(조재모 교수는 그간 ‘공간과 행위의 관계’를 통해 궁궐을 읽는 작업을 지속해온 젊은 학자로서, 이 책에서 궁궐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기존의 관점과 연장선상에 있다.) 공간 구성이나 배치 등의 건축적 요소가 궁궐의 하드웨어라면, 운영 방식 등의 건축 외적인 요소는 궁궐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다.

    1부 <궁궐, 그 복잡한 얼개>에서는 건축을 읽기에 앞서 궁궐 운영을 둘러싼 여러 키워드를 다루었다. 궁궐의 계획 개념과 운영법이라 할 의례 문제, 의례 속에서 살아간 왕실 사람들의 존재를 살폈다. 2부 <규범과 관습의 타협, 궁궐 건축>에서는 궁궐 배치·공간 구성 등 물리적 실체로서 건축 공간을 이야기했다. 1부에서 언급한 의례라는 운영체제가 원활히 작동하려면 하드웨어가 최적화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의례와 궁궐 건축이 주고받는 관계가 2부의 주제이다. 3부 <궁궐을 뒤흔든 욕망>에서는 궁궐 운영의 규범에 균열을 낸 욕망과 그로 인한 건축적 변모를 조망했다. 절대 권력의 취향·근대화·외세의 영향력 등이 궁궐을 변모시킨 요소들이다. 결국 궁궐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규범 바깥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축 공간이기에 이러한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전문가인 지은이가 오랫동안 공부하고 답사하며 축적한 풍부한 문헌자료의 해석을 통해 이미 소멸한 건축 유형인 궁궐의 속살을 세세히 살핀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지은이 특유의 안목의 깊이와 새로운 관점을 만나는 재미 또한 느낄 수 있다.





    공간 사용에 대한 몇 가지 가설과 질문

    궁궐을 넘어 그 시대의 도시와 건축을 둘러싼 제 문제에 대한 접근으로




    이 책은 단순히 궁궐 건축뿐 아니라 그 건축 뒤에 자리한 정치적 의미를 살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종의 경복궁 정비를 예치의 차원에서 진단하는 것이나, 성종 대의 대비전 영건을 ‘대비의 수렴청정에 대한 임금의 도덕적 리액션’이라는 상징적 행위로 읽는 점 등이 그렇다. 또 책 곳곳에서 지은이는 문헌이 증언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가설을 제시해 흥미롭다. 제사용 건물이나 빈전이나 혼전으로 오랜 기간 사용된 편전 전각에 복도각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복도각이 제사의 형태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추측 등은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해 새로운 학문적 해석의 가능성을 남긴다. 무엇보다 북경의 자금성이나 교토 어소 자신전의 기타비사시, 베트남의 후에 궁궐 등 동시대 동아시아 궁궐의 고찰을 통해 조선 궁궐의 특징을 규명하는 부분도 눈여겨볼 만하다.

    궁궐은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공간이자, 당대 건축 기술과 운영 이념이 집약된 매력적인 공간이다. 문화재청이 ‘문화가 펼쳐지는 궁궐, 역사가 숨 쉬는 궁궐’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2009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한국관광공사 등과 함께 3년간 312억 원을 투자해 선보이는 대규모 사업 또한 궁궐을 중심으로 역사를 읽으려는 맥락일 테다. 하지만 궁궐에 대한 무수한 자료 속에서 단지 궁궐 그 자체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시선은 그 시대의 도시와 건축을 둘러싼 제 문제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물리적으로 사라진 건축이 가진 의미를 살피려면 건물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궁궐을 둘러싼, 또 궁궐을 넘어선 다각적 접근의 한 예를 제시할 것이다.





    궁궐은 왜 그 자리에, 그런 모습으로 있는가

    장별로 보는 궁궐의 이모저모




    1부 <궁궐, 그 복잡한 얼개> : 의례와 궁궐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운영 방식

    1장 「궁궐 유토피아―중국의 궁궐 제도」에서는 조선의 궁궐을 살피기에 앞서 동아시아의 궁궐 문화를 살핀다. 동아시아의 궁궐들은 한 아버지를 둔 배다른 형제들처럼 중국 궁궐의 강고한 영향력 아래 보편적인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편성의 키워드는 ‘위엄’과 ‘예치 사회에 대한 지향’이다. 즉, 천하의 중심이라 할 만한 자리에 대규모 건축군을 구성하고, 이 하드웨어를 훌륭히 운영할 제도를 완비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궁궐을 만든 이들의 관점이었다.

    2장 「궁중, 그 특별한 생활―의례」에서는 유교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명문화된 행동 패턴인 의례를 주제로 했다. 의례는 궁궐에 사는 사람들의 행위를 일반화해 살필 수 있는 강력한 틀로, 성종 연간에 예학적 성과를 집대성한 『국조오례의』나 큰 행사나 공사 때마다 펴낸 각종 의궤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왕실의 의례는 민간에 일반적인 관혼상제에 길례(종묘사직 등 제사의식), 가례(임금과 신하의 조회나 중국에 대한 사대례 등), 빈례(사신 접대), 군례(군대 통솔), 흉례(국상)의 다섯 개의 예법, 즉 오례가 더해진다.

    3장 「조정에 들다―조회 의식」에서는 의례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조회 의식을 다룬다. 조회는 문무백관과 종친 등 왕실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임금과 만나는 행사로 임금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행위이자, 신료들에게는 그들의 이상사회를 구현하는 통로였다. 조회는 조하(朝賀, 정월 초하루와 동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 등에 거행되는 대규모 의식), 조참(朝參, 5일마다 근정문에서 거행된 의식), 상참(常參, 매일 아침 이뤄지는 상견례) 등으로 이루어진다. 조회를 받을 때 임금은 궁궐 깊은 곳에 있다가 앞으로 이동하고(즉, 사정전에서 준비하고 나와 근정전의 뒷문을 열고 앞으로 나온다), 신하들은 궁궐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만나는 동선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궁궐 최대의 엄격한 행사였던 조회도 시대가 변하면서 일상적인 소대(召對)나 경연 등으로 간소화되었다.

    4장 「왕실의 사람들―임금과 왕세자의 공간, 중궁전과 대비전」에서는 궁궐 공간 사용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왕실의 인적 구성원을 살핀다. 이들 중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임금과 왕세자의 거처로, 경복궁만 해도 근정전·사정전·강녕전 등 중심축을 이루는 전각들과 서쪽의 경회루, 궐내각사 등은 모두 임금을 위한 전각들이고 동편의 자선당을 비롯한 동궁전 일곽은 왕세자를 위한 공간이다. 한데 임금과 왕세자의 공간에 비하면 규모는 작을지라도 궐내 여성들의 공간, 특히 대비전은 그 수가 많기도 했고 시대에 따라 이들을 위한 별도의 건축 공사가 이루어져 궁궐의 배치를 바꾸기도 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대비를 여럿이 함께 모셔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경전·만수전·집상전 등은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지은 대비전이다.

    5장 「개인인가, 임금인가―왕실의 통과의례」에서는 2장에서 언급한 의례를 임금의 삶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임금은 관혼상제와 더불어 오례를 지켜야 했고, 궁궐 공간은 이러한 의례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준비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공인이자 사회적 모범으로서 면모를 보여야 했던 임금 또한 개인이었기에 이 두 가지 면모는 늘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6장 「죽은 자를 위한 헌사―빈전·혼전·선원전」에서는 2장에서 언급한 의례 가운데에서도 상장례를 중심으로 궁궐을 살핀다. 궁궐의 삶 속에서도 상장례를 위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기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종묘와 선원전 의례의 중시, 빈전과 혼전의 설치와 궁궐 공간의 변동 등은 모두 상장례의 보수성 때문이다. 창덕궁에서는 선정전이, 창경궁에서는 문정전과 같은 편전이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후대인 고종 대로 오면 태원전, 문경전 등 제사용 건물 영역을 별도로 만들기도 했다.



    2부 <규범과 관습의 타협, 궁궐 건축> : 물리적 실체로서 궁궐 건축 공간

    7장 「조선 궁궐 배치의 특징―경복궁·창덕궁」에서는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궁인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한다. 두 궁궐은 조선 궁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대립항으로, 법궁인 경복궁이 강렬한 중축선을 자랑해 중국식 규범에 충실하다면, 이궁인 창덕궁은 병렬식 배치와 아기자기한 구성, 주변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풍광을 자랑해 ‘조선적 궁궐 배치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전과 편전, 침전을 서로 가깝게 연결해 임금의 움직임을 배려한 것이나 외전과 내전의 공간을 구분하고, 의식의 진행에 필요한 몇 겹의 마당을 둔 것 등은 두 궁에 유사한 공간적 장치들이다.

    경복궁은 세종 대에 크게 변모했다. 이를 8장 「유교적 예치 공간으로 태어나다―세종이 꿈꾼 궁궐」에서 다룬다. 세종은 ‘유교적 예치 공간’으로서 궁궐을 인식한 최초의 군주로, 국가 의례를 합리적으로 정비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에 새로운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왕세자의 혼례 절차를 정하고 경복궁 내에 동궁 전각을 건설한 것, 문소전 건립 계획에 관여한 개조 작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궁궐이라는 공간을 일치시키려던 세종의 면모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9장 「궁궐 건축의 유형―정전·편전·침전」에서는 제목 그대로 궁궐 건축의 유형이라고 할 만한 정전·편전·침전의 존재와 형태를 보여준다. 대체로 정전은 다섯 칸, 편전은 세 칸, 침전의 대청 크기는 세 칸 규모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기둥 배열 방식이나 온돌방의 크기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지은이는 궁궐 장식의 상징에 대한 연구만큼이나 정전·편전·침전 같은 건축물의 구체적인 모습과 평면 계획은 좀 더 비중 있게 연구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10장 「온돌과 관련된 흥미로운 문제들―좌식 공간·굴뚝·병렬식 배치·툇마루」에서는 우리 생활 관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온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궁궐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인 만큼 침전에 온돌을 사용했고 이는 굴뚝 사용 같은 운영 방식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온돌과 마루를 깔면 공간을 좌식으로 사용해야 하고, 이런 경우 신발을 벗고 나온 곳으로 돌아 나와야 하기에 그만큼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따라서 건물을 통과해 다니기가 불편한 좌식 공간 문화에서는 일직선 배치보다는 옆으로 늘어선 배치법이 활용되었다. 툇마루의 발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11장 「고전적 사고방식에서 실용성의 중시로―정침의 변동 양상」에서는 유교적 개념 속에서 하나의 건축 형식으로 규정된 ‘정침’이 조선의 궁궐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살핀다. 정침은 ‘일상적 연거의 공간’으로 궁궐에서는 편전에 해당하지만, 편전에는 온돌이 없어 일상적 연거의 공간으로 침전이 함께 쓰였다. 이 장에서는 관념 속 정침이 시대별 생활관습이 변화하며 실제로 어떤 모습을 띠었는지 알 수 있다.

    정전·편전·침전 외에도 조선 궁궐은 훨씬 다양한 활동을 위한 공간을 담아야 했다. 그중에서도 잔치는 큰 규모의 행사로 무희와 악공, 참석자들의 자리를 위해 훨씬 큰 무대가 필요했다. 12장 「진연을 베풀어라―마당·보계」에서는 진연을 위한 마당과 보계(가설무대), 남녀의 시각적 접촉을 막는 가림막 이용 등을 소개한다.

    한편 세종과 성종이 정비한 궁궐의 운영 방식은 조선 중기 이후 변화를 거친다. 특히 영조와 정조 대에 궁궐 의례 정비가 실시되는데 13장 「위대한 시대, 18세기의 복고―영·정조 대의 의례 정비」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돌아본다. 이 시대에는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요구되었고, 그 하나의 방편으로 길례와 조의에 초점을 맞춘 의례의 부흥이 추진됐다. 영조 대에 『국조속오례의』를 편찬한 것이나 정조 대에 인정전 마당에 품계석을 세운 것 등이 대표적 시도다.



    3부 <궁궐을 뒤흔든 욕망> : 규범의 틈새를 파고드는 욕망과 그에 따른 건축적 변모

    14장 「궁궐 건축에 드러난 권력자의 욕망―연산군·광해군·흥선대원군의 궁궐」에서는 궁궐 건축의 권력 지향적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동양 사회의 궁궐은 예치의 틀 속에 있어서 임금의 욕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연산군·광해군·흥선대원군은 예외적인 존재로 자신의 무제한적 권력을 이용해 대규모 건축 공사를 단행했다. 연산군은 창덕궁 후원의 서총대 공사를, 광해군은 인경궁과 경희궁의 공사를,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이래 270여 년간 공터로 남아 있던 경복궁의 중건을 꾀했다.

    5장 「개인인가, 임금인가―왕실의 통과의례」에서 언급했듯이 임금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은 개인의 욕망을 최대한 억누르고 궁궐 안에서만 살아가야 했다. 온갖 의무를 강요받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날 휴식 공간이었을 터, 15장 「왕실 가족의 일상사와 유희―창덕궁 후원」에서는 그런 공간 중 하나로 창덕궁 후원을 엿본다. 창덕궁 후원은 권역별로 나뉘어 나름의 특색을 자랑하는데, 이는 어느 빼어난 조경 계획가가 일시에 조성한 것이 아니다. 각 권역은 그곳에 관심을 가진 임금의 생각이 개입된 만든 별개의 영역으로 이 장에서는 시대적 고민을 바탕으로 건축 실험을 한 임금들을 만날 수 있다.

    16장 「은혜와 의리의 충돌―효사묘·육상궁·경모궁」에서도 개인으로서 임금과 공인으로서 임금의 갈등을 만날 수 있는 장이다. 자식 된 도리로 은혜를 갚는 데 치중할 것인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예법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는 늘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왕실 사묘 건립’에서 그 갈등이 도드라졌다. 예를 들어 영조의 생모 숙빈은 정비가 아니므로 종묘에 향사돼 국가적인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처지였는데, 영조는 법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위해 별도로 육상궁을 두고 경희궁에 머물며 이곳을 출입했다. 정조 또한 생부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을 세우고 더 자주 참배하기 위해 창경궁 담장에 월근문이라는 별도의 문을 내기도 했다.

    한데 왕실사묘 참배 이면에는 세상과 만나기 힘들었던 임금이 백성과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자리했다. 17장 「궁궐 바깥 세상과의 만남―사묘 참배·백성과의 대면」에서는 영정조 대 임금의 도성 내 행차를 비롯한 능행, 화성 행행 등을 언급한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영조와 정조가 민의를 수렴하고 세상을 더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18장 「근대로의 전환과 도전―서양식 건축·의식의 변화」와 19장 「사라진 궁궐―외세의 욕망과 궁궐의 훼손」에서는 궁궐에 영향을 미친 외세의 영향을 살핀다. 18장에서는 서구의 영향 아래 달라진 서양식 궁궐의 모습을, 19장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궁궐의 훼손을 다루었다. 중화전의 입식 공간으로의 변화나 전기와 커튼 설치, 서양식 실내 장식의 도입이며 희정당과 대조전의 서양식 포치의 설치 등은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근대화의 단면이다. 근대화뿐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궁궐은 더욱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왕권과 제국의 상징에서 전근대성과 후진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급격하게 본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이 들어서 민간의 오락시설로 사용된 점이나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청사가 들어선 것,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이 경복궁 강녕전·교태전을 헐어낸 자재로 복구된 것 등이 파괴의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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