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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 사회과학
  • 저자최정운
  • 출판사오월의봄
  • 출판년2012-10-25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3-01-03)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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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는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하진 절대공동체는 어떻게 탄생하고, 몰락했는가?

    새로운 사회과학 글쓰기로 해방광주를 생생하게 복원한 우리 시대의 명저



    5·18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 것




    “5·18은 사건으로서 엄청난 사회과학 이론적 함의를 갖고 있다. 현대 한국 사회,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는 5·18과 5·18의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외딴 무인도에서 서양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마찬가지로 외딴 섬 나라 ‘광주’는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이 변화의 원인과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5·18은 한국 현대사를 바꿔놓은 큰 사건이었다. 《오월의 사회과학》의 저자 최정운은 5·18이 없었다면 6월 항쟁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5·18의 의미는 우리 현대사에서 간단치 않다. 하지만 그 진상과 의미는 32년을 맞은 지금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사건으로 인식되며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5·18 자체를 잘 알지도 못한다. 또 국가 권력의 횡포는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당시 학살 책임자도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상황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기존의 5·18 관련 연구 자료들은 ‘진상규명’과 ‘사실’들에 지나치게 매달려왔다. 그리고 이미 설정된 서구 담론의 틀에 끼워 맞춰 해석하거나, 필자들의 이념 지형에 사건을 끼워 맞춰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학자 최정운은 이런 방식으로는 사건의 참모습을 그려낼 수 없다고 말하며 이 역사적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다.

    《오월의 사회과학》은 그동안 발표된 5·18 관련 서적, 논문 등과는 완전히 다른 책이다. 시각도 새롭고 글쓰기 방식도 새롭다. 우선 저자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의 광주 상황을 박진감 넘치는 문체로 생생하게 복원한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 마치 당시 현장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또한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저자 최정운은 외관으로서의 사실이 아니라 시민들이 겪었던 내적 경험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말하자면 증언을 통해 시민들이 당시 가졌던 생각, 감정 상태 등을 감정이입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5·18을 마치 자신이 겪은 사건처럼 다시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을 추구하는 사회과학만이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몇 백 배 깊이 있는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이러한 내적 경험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방법을 막스 베버의 ‘이해하기 위한 사회과학’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베버가 발명한 특이한 방법론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적 사건이나 어떤 역사적 시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흔히 사용하는 ‘생각하는 방법’을 베버가 재구성하여 정리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저자는 해방광주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공동체를 ‘절대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절대공동체의 형성과 몰락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절대공동체는 폭력에 대한 공포와 자신에 대한 수치를 이성과 용기로 극복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민들이 만나 서로가 진정한 인간임을, 공포를 극복한 용기와 이성 있는 시민임을 인정하고 축하하고 결합한 공동체였다. 시민들이 공포를 극복하고 투쟁하며 추구하던 인간의 존엄성은 이제 비로소 존엄한 인간끼리의 만남 그리고 바로 이 공동체에서 서로의 인정과 축하를 통해 객관화되었다. 절대공동체에서 시민들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았고 그들은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5·18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피해의 규모 문제 외에 특이한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5·18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되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5·18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단적으로 5·18은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건이었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요인들을 다시 배열시킨 사건이었다. 5·18은 우리의 몸에서 출발하여 영혼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저자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증언록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한국현대사료연구소 편)에서 찾았다.

    이 책은 1999년 처음 발간된 것을 다시 펴낸 것이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책 중 한 권으로 뽑혀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소개된 바도 있는 명저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회과학을 보면서 울 수도 있구나’를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가 감정이입을 통해 서술한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가슴이 울렁이고, 눈물이 고이게 된다. ‘우리의 사회과학’ 글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5월 18일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980년 5월 18일 정오 무렵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 중심가 금남로 일대에는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기동경찰대가 출동하여 이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 대학생 데모는 당시 한국 대도시에서 심심치 않게 보아오던 것이었다. 대학생이 데모를 하면, 경찰이 진압을 하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특이한 사항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후 4시에 터졌다. 경찰이 아니라 공수부대가 출동해 무차별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치명적인 진압봉으로 폭력을 가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까지 욕설을 퍼부으며 구타하고 여성들을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는 성도착적인 잔인성을 보였다. 그때부터 벌어진 일들은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머릿속에 준비하고 있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고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수도 없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광경을 일일이 묘사해 전해주면 대부분의 사람들, 광주 시민이나 타 지역 사람들이나 사실로 믿지 않았다.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짐승’이었고, 그들의 행동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수부대의 이런 잔인한 진압 방식은 전시적 폭력, 즉 폭력극장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구타를 당하는 사람 외에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공포를 주는 것이며, 따라서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더욱 효과적이라 여겼다. 죽거나 살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처참하게 패고 찌르고 자르는 등 엽기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진압의 기본 원칙이었다.

    공수부대는 여기서 끝이 날 줄 알았다. 실제로 그 전 해 1979년에 있었던 부마사태는 이 상태에서 모두 진압이 되었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18일, 19일 이틀에 걸쳐 일어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만행’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인간 이하라는 수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이 인간 이하임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됐다는 분노는 광주 시민들을 사선을 넘어 공수부대와 싸워야만 했던 운명으로 만들었다.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과감히 투쟁에 참여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임’을 회복하기 위해 이성으로 하여금 공포를 뚫고 과감히 분노를 분출하도록 내린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성적인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일 공수부대는 장갑차도 동원했고 그들의 잔인함은 맹위를 떨쳤다. 다시 점심때쯤 거리는 텅 비어버렸고 공수부대는 안심하고 주둔지로 식사를 하기 위해 철수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시위대가 다시 형성되었다. 이날 오후부터 시위대는 학생들 중심이 아니었다. 중심가의 시민들이 참여했고, 양복 입은 회사원들 그리고 노동자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그리고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이미 폭발했고, 시민들은 공동체의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일, 공수부대들은 전날과 다르게 공손해져 있었다. 그날 오후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내로 나왔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과 기사들이 참여한 대규모 차량시위도 이날 벌어졌다.





    내 것, 네 것이 없는 절대공동체가 이루어지다



    저자 최정운은 20일 오후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저자는 ‘절대공동체’의 개념을 만들어 그날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 절대공동체는 마이크를 잡고 선동한 어떤 리더가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다. 모든 시민이 각자 지도자였고, 각자가 자기 할 일을 하며 계엄군과 싸웠다. 이곳에는 사유재산도 없었고, 생명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다. 광주 시민 30만 명이 금남로에 나와 <아리랑>을 목청껏 부르며 계엄군과 대치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 도시 인구 전체가 거의 빠짐없이 시위에 참가해 완전한 합일을 이룬 상황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20일 수만 명에 이른 시위대는 시간도 잊고 피로도 잊고 밤을 지새우며 싸웠다. 일부는 돌아가며 골목에서 거적을 깔고 눈을 붙이기도 했고 근처 여관, 민가 어디에서나 잠깐씩 눈을 붙이고는 다시 교대로 싸웠다. 새벽 4시 광주역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승리의 새벽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21일 공수부대는 대원들에게 은밀히 실탄을 나눠주었고, 애국가를 신호로 기어이 도청에서 집단발포를 가하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제 시민들도 총을 들기 시작했다. 21일 저녁 시민군들은 도청에 진입했고 공수부대는 이미 철수한 뒤였다. 감격스러운 승리였다. 광주 시민들이 무려 3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나흘간의 투쟁을 통해 물리친 것이다.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공동체를 이루어냈기 때문이었다. 이 절대공동체는 애초에 존재했던 광주 시민들 간의 전통적 농촌 배경의 공동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이 과정의 경험은 공포를 이성으로 극복하고 인간이 되기 위해 나섰던 각각의 시민들이 다수의 동료들을 만나 하나로 융합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자신, 인간의 존엄성에 의혹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변화의 과정이었고 이는 해방을 의미했다.





    계급의 등장, 절대공동체에 균열이 생기다



    시민들이 무기를 잡은 순간 절대공동체는 작은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광주 시민들은 돌연 그곳에서 계급을 보았다. 그리고 서로가 같지 않고 다름을 보았다. 19일, 공수부대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시기 대학생들은 이미 시위대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총을 든 시민들은 대부분 노동자계급, 기층민이었다.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은 서로가 다른 삶을 사는 집단, 다른 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절대공동체가 분해되며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 문제였다. 한편으로 이 문제는 권력 문제였고 다른 한편 계급 문제였다. 절대공동체에서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던 질문, ‘당신 누구야?’, ‘당신 뭐야?’ 하는 질문들이 어디서나 튀어나왔고 여기서 요구되는 답은 늘 신분과 계급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 질문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 대답할 수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대답을 해도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너와 내가 구분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절대공동체는 새롭게 재편되었고, 새로운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광주의 진실을 죽음으로 지키다



    광주는 시민군들에 의해 해방되었다. 도청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먼저 사태를 수습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우선 수습파가 먼저 나섰다. 그들은 당장 무기를 회수하자고 주장했고, 실제로 무기를 회수했다. 이들은 얼른 이 사태를 정리하고 이전의 사회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전의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은, 해방광주와 절대공동체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반하는 세력이 곧 적극 주장하고 나섰다.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항쟁파와 시민군 세력이었다. 그리고 곧 윤상원은 이들을 중심으로 항쟁지도부를 구성하고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민군은 무기 회수로 대부분 붕괴된 상태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버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수부대가 27일 새벽 도청을 공격한다는 정보도 알고 있었다. 윤상원은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최후까지 싸울 사람은 남고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마지막 항전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막 항전을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결과가 없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사방에서 밀려 들어왔다. 도청 정면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계엄군이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시민군들이 모두 정면으로 응사하는 동안 뒷담을 넘어 들어온 3공수 특공대는 도청 건물로 잠입하여 보이는 대로 총을 난사하고 여기저기 수류탄을 까 넣었다. 그러고는 확인 사살까지 했다. 많은 시민군들은 특공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일부 살아남은 시민군들은 손을 들어 항복했고 그들은 모두 ‘굴비처럼’ 엮여 버스 4대로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이날 새벽 도청에서 사망한 숫자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도청의 시민군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지만 계엄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다만 광주의 진실, 투쟁의 진실을 죽음으로 지켰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적들이 진실을 영원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모든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생매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정한 정신으로 그 자리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의 진실을 깊은 땅 속으로 감추어 자신들의 몸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 앞에 진실로서 부활할 수 있도록 화석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 희생의 제단 위에서 우리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이들이 무기를 놓고 도청을 계엄군에게 비워줬더라면 6월 항쟁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 이 시간도 ‘5공’ 치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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