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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 저자이현우
  • 출판사오월의봄
  • 출판년2012-10-24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3-01-03)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 듣기기능 TTS 지원(모바일에서만 이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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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영향력 있는 서평꾼’ 로쟈와 함께 떠나는 세계문학 여행

    《폭풍우》, 《파우스트》, 《신곡》, 《이방인》, 《호밀밭의 파수꾼》, 《데미안》……

    불멸의 고전들, 이 시대의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태어나다!



    세계명작을 고쳐 읽고, 다시 쓰다




    본명 ‘이현우’보다 ‘로쟈’(도스토예스키의 《죄와 벌》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사람. ‘곁다리 인문학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 서평꾼’, ‘하루에 1천 명이 방문하는 블로그의 주인장’, ‘책을 탐독하는 유전자를 타고난 서평 블로거’, ‘경계 없는 인문지성’, ‘인문학 전도사’, ‘우리 시대의 대중지성’, ‘지젝을 읽기 위한 충실한 안내자’……. 이런 수식어가 늘 따라 붙는 사람. “인문학을 읽기 전에 로쟈에게 물어보라”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는 우리 지성계에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를 펴냈다. 사실 그는 인문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본령은 문학 연구자이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 서적을 탐독했다. 헤르만 헤세와 알베르 카뮈를 그 시절에 읽었고, 스탕달과 브론테, 오 헨리와 모파상, 체호프의 작품도 그때 읽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를 더 공부하고 싶어서 자연히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를 관통했던 두 시인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서정시를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요즘도 대학과 대중 강연에서 러시아문학과 세계문학을 활발하게 강의하고 있다.



    “‘세계문학’이라고 불리는 외국문학 작가들이 한국 작가들보다 더 친근했으니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정한 대학 진로는 자연스레 외국문학 쪽이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도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를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하긴 ‘로쟈’란 이름도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 책은 문학 연구자인 로쟈가 처음으로 대중을 대상으로 내놓은 문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세계문학을 ‘다시 읽기’ 위한 책이다. 로쟈는 서문에서 ‘다시 읽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들 작품에 대한 읽기를 굳이 ‘다시 읽기’라고 적은 것은 실제로 대부분의 글이 다시 읽기의 결과물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고전은 다시 읽기의 대상’이라는 관점을 반영한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읽기란 단순한 반복적 읽기가 아니라 ‘고쳐 읽기’이고 ‘거슬러 읽기’이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세계문학 다시 읽기’란 제목을 단 1부에는 13개의 작품에 대한 글과 그것과 함께 읽으면 좋을 만한 작품을 ‘겹쳐 읽기’란 이름으로 배치해놓았다. 2부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에는 세계문학을 읽고 생각해보는 데 참고가 될 만한 글들, 세계문학을 읽기 위해 알아야 할 여러 교양 지식들을 담아놓았다.

    1부 ‘세계문학 다시 읽기’에 소개되어 있는 작품은 모두 세계문학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 셰익스피어와 괴테, 단테 같은 문호를 앞세우고, 푸슈킨과 레르몬토프, 고골, 안데르센 등의 작품을 거쳐, 현대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로쟈 자신이 세계문학에 매료됐던 나이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썼기에, 젊은 세대와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작가와 작품을 선택했다.

    2부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에는 ‘세계문학’의 전제조건인 다양한 교양 지식을 먼저 전달하고 있다. 즉 국가, 세계시민, 언어의 운명에 대해서 이론적인 고민을 한 뒤에, 과연 무엇이 세계문학인지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들을 읽다보면 로쟈가 던지는 다양한 질문거리와 만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왕권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작품이 아닐까? 거대한 제방공사를 기획하는 파우스트의 유토피아는 오늘날의 개발주의와 어떻게 다를까? 그런 의미에서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것은 과연 정당할까? 반전주의자 헤세는 왜 전쟁을 긍정하는 《데미안》을 썼을까? 안데르센 동화에는 왜 계급적, 우생학적 시각이 깔려 있을까? 《프랑켄슈타인》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어떻게 다시 해석했을까?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가인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는 사랑과 이별을 서로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과연 무엇이 진짜 세계문학일까? 이런 질문이 책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작품을 읽는 것이 ‘다시 읽기’ ‘고쳐 읽기’의 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제국주의, 고전을 보는 새로운 시각

    -셰익스피어의 《폭풍우》 다시 읽기




    이 책에서 로쟈는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다. 읽고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쳐 읽고 다시 쓰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폭풍우》를 보자. 그는 이 장에서 셰익스피어를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는 튜더 왕조(1533~1603) 말기에서 스튜어트 왕조(1603~1688) 초기이다. 이 시대는 봉건주의에서 절대주의 국가로 넘어가는 이행기였고, 당연히 권력은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시기에 셰익스피어는 왕권 찬탈을 둘러싼 권력 다툼을 자주 다루었는데, 명확하게 왕권을 지지하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입장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대서양의 패권을 차지하고 식민지 경영의 선두 국가가 되던 때였다. 로쟈는 이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읽는다. 주인공인 프로스페로나 미란다, 알론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야만적이고 흉측한 노예’로 소개되는 칼리반의 입장에서 작품을 재해석한다.

    처음 프로스페로가 섬을 정복하기 전에 그 섬의 주인은 칼리반이었다. 프로스페로가 섬에 도착했을 때 칼리반은 호의적으로 그를 대했다. 하지만 프로스페로는 그런 칼리반에게 딸 미란다를 강간하려 했다는 죄를 씌워 노예로 삼아버린다. 이에 저항해 칼리반은 반란을 기도한다. 그러나 그의 반란은 희화적으로 묘사될 뿐 결국 단숨에 제압되고 만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빼앗긴 자신의 섬을 되찾으려는 칼리반의 시도는 식민지 해방 투쟁에 값하지만, 그는 이것이 스테파노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김으로써 가능하리라고 본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다. 그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을 탐욕과 환상이 빚어낸 어리석은 행동으로 줄곧 그려왔고, 《폭풍우》에서 칼리반의 반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프로스페로의 용서를 받은 칼리반은 다시 ‘길들여진 노예’ 상태로 돌아간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야만인’ 칼리반은 교정이 필요한 위협적인 존재이고, 강간이나 모반 같은 반사회적인 행위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그 당시 연극의 주된 관객이었던 영국 지배계급의 식민주의적 태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쟈는 《폭풍우》 다시 읽기를 통해, 이 작품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용도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다시 해석하는 것이 고전의 의의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파우스트의 구원은 과연 정당한가?

    -괴테의 《파우스트》 다시 읽기




    어떻게 문학 고전을 읽어야 할까? 혹시 줄거리를 파악하기에 급급해하지 않은가? 그러다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지는 않는가? 특히 《파우스트》를 읽을 때, 그런 함정에 빠질 때가 많다. 괴테가 평생을 걸쳐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자 독일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파우스트》는 줄거리를 파악하기에도 복잡한 작품이다. 로쟈는 이 난해한 걸작을 알기 쉽게 풀어주면서도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

    파우스트는 도대체 어떤 유토피아를 꿈꿨기에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겼을까? “파우스트가 이겨내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반복을 통해서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파도, 곧 자연의 지배력이다. 그는 이 자연과의 싸움을 위해서 거대한 제방 공사를 기획하여 백성의 노동력을 쥐어짠다. 파우스트가 꿈꾸는 것은 그렇게 해서 얻으려고 하는 ‘자유로운 땅’이고 ‘천국’이다.”

    파우스트는 지상에서 최고의 순간을 맛본다면 자신의 삶을 가져가도 좋다고 메피스토와 내기를 했고, 마침내 그 순간에 도달해 죽음을 맞이한다. 메피스토는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수습해가려 하지만, 이때 천사들이 내려와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상으로 데려간다. 곧 파우스트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럼 파우스트의 구원은 정당한 것인가? 로쟈는 이 부분에 물음표를 던지며 파우스트의 행위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행위를 ‘개발 지상주의자’이자 ‘근대의 기획자’, ‘근대성의 화신’으로 해석한다. “이때의 근대는 무한한 소유욕과 지배욕을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근대 자본주의’다. 파우스트는 ‘그의 정신으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소망’이라 토로했다. 그렇듯 무한히 팽창하려는 파우스트적 욕망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구현한 것, 그것이 바로 ‘근대 제국주의’ 아니던가.”

    이에 반해 메피스토는 모든 창조는 결국엔 무로 휩쓸려가게 마련이라고 여기는, 유위(有爲)보다는 무위(無爲)를 예찬하는 ‘허무주의자’로 바라본다. 그리고 오늘날 파우스트의 개발주의와 메피스토의 허무주의 중 어떤 태도에 더 점수를 줄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떤 태도가 더 우리에게 필요한가. 그런 점에서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데미안》과 전쟁 예찬

    -헤세의 《데미안》 다시 읽기




    《데미안》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성장소설로 청소년의 필독서로 세대에 걸쳐 권장되어왔다. 이 소설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청소년기에 이 작품을 접하게 된다. 사실 《데미안》은 인물과 상황에 대한 불명료한 묘사와 관념적인 내용, 신비적인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브락사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데미안과 악마, 데미안의 어머니, 방황……’ 이런 이미지들을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읽었다고 자부한다. 과연 제대로 읽었을까? 그렇다면 로쟈는 어떻게 다시 읽고 있을까?

    헤르만 헤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쟁을 반대한 작가로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을 때, 헤세는 스위스의 일간지에 지식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와 애국주의를 비판하는 반전 호소문을 실었고, 이로 인해 조국 독일 언론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이 찍힌 바 있다. 이에 상처를 받은 헤세는 아예 국적으로 스위스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이런 헤세가 1919년에 발표한 《데미안》에는 역설적으로 전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작품의 핵심 모티프인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새의 형상’이 전쟁을 통해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전쟁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성이 탄생하는 과정으로 그려져 있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시각은 헤세의 반전 활동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또 로쟈는 데미안의 시각을 나치의 우생학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데미안은 인류가 가는 길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미리 돼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자신의 종(種)을 구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그것은 발전사적 과정이며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 이러한 관점은 나치의 우생학과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헤세의 ‘개인’을 나치는 ‘종족’으로 바꿔놓았을 뿐이다.”





    안데르센은 왜 상류계급을 예찬했을까?

    -안데르센의 동화 다시 읽기




    로쟈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안데르센의 자서전과 함께 읽으면서 그 바탕에 깔려 여러 이데올로기들을 발견한다. 덴마크가 ‘동화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유는 156편에 이르는 동화를 발표한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 덕분이다. 그런 그는 가난했고, 하층계급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고 상류계급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을 썼고, 그 상류계급에게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안데르센의 대표작인 《미운 오리 새끼》의 교훈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 낙담하지 말고 잘 견디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계급적, 우생학적 전제가 깔려 있다. “일단 고상한 ‘백조’와 평범한 ‘오리’라는 전혀 다른 종의 구분이 있으며, 이들 간의 우열 관계는 이 동화에서 전혀 의심되지 않는다. 이들의 각기 다른 운명은 ‘아름다운 정원’과 ‘농장’이란 공간적 대비에서도 확인된다. 농장에서 태어난 ‘아기 백조’가 열등한 하층계급 동물들에게 구박받고 쫓겨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아기 백조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아기 백조’는 차라리 백조들에게 죽는 게 낫다고까지 여긴다. 여기서 안데르센은 평민들의 운명에 대한 분명한 경멸을 표현한다. 하층계급 사이에서 고난을 당하느니 상류계급에게 모욕당하는 것이 더 낫다는 식이다.”

    또 다른 대표작인 《인어 공주》는 왕족과 사랑에 빠진 인어 공주가 상류계급과 섞이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초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인어 공주는 물 밖으로 빠져나와 왕족들 사이로 걸어 다니기 위해 꼬리가 다리로 변형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다리로 걷거나 춤출 때마다 칼날 같은 아픔을 감수한다. 그녀는 자신이 왕자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는데도, 자기 부류, 자신의 계급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부정과 함께 다만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할 따름이다.”

    이렇듯 안데르센은 상류계급에게 예속된 상태에서 평생에 걸쳐 그들을 모범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작품을 썼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이 고통과 굴욕, 모멸과 고문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로쟈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안데르센은 비록 비굴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우러러보았던 가치를 동시에 혐오할 수 있었던 점이 아마도 그의 진정한 천재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 이 책에는 단테의 《신곡》,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엘리엇의 《황무지》,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사랑시, 고골의 <외투> 등이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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